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승·오광의 난 (문단 편집) == 평가 == >"진섭(陳涉)의 지위는 [[제(춘추전국시대)|제(齊)]], [[초(춘추전국시대)|초(楚)]], [[연(춘추전국시대)|연(燕)]], [[조(전국시대)|조(趙)]], [[한(전국시대)|한(韓)]], [[위(전국시대)|위(魏)]], [[송(춘추전국시대)|송(宋)]], [[위(춘추전국시대)|위(衛)]], [[중산|중산국]](中山國) 등의 군주들의 그것에 비해 보잘것없을 정도로 비천했으며, 그가 거사를 할 때 사용했던 호미와 [[곰방메]] 그리고 가시나무로 만든 창은 제후들의 군사들이 사용했던 극(戟)과 갈고리 창에 비해 날카롭지 않았다. 더욱이 유배되어 변경을 지키러 가던 군사들의 수는 구국(九國)의 군주들이 거느린 군사들의 숫자에 비해 턱없이 적었다. 또한 심모원려(深謀遠慮)에 의해 행군과 용병의 도리를 깨우친 사람도 예전의 모사(謀士)들에 비해 상대가 되지 않았다. > >"그러나 일개 필부였던 진승(陳勝)이 한번 일어나자 [[진(영성)|진]](秦)의 칠묘(七廟)가 무너지고 진왕(秦王)의 목숨은 다른 사람의 수중에 떨어져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된 것은 어떤 연유에서인가? 그것은 인의(仁義)를 베풀지 않고 공수(攻守)의 도리를 잘못 적용한 때문이었다." >---- >'''저소손(褚少孫)'''[* 전한 [[선제(전한)|선제]] 시대의 학자다. 당시 많은 부분이 소실된 《[[사기(역사책)|사마천의 사기]]》 소실 부분을 보완했다.] >진나라에게 멸망한 여섯 나라 가운데 특히 초나라의 원한이 가장 컸다. 진나라에 억류당해 그대로 죽은 [[초회왕|회왕(懷王)]]의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남공(南公)은 "두고 보라. 초나라가 민가 세 채만 남을 정도로 쇠퇴하더라도 결국 진나라를 멸할 자는 초나라일 것이다." 하지 않았던가? 진승이 초나라에서 일어나자 많은 무리가 따랐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는가? ([[항량]]: 그 모두 진나라의 폭정에…) 아니다. 다들 진승이 초나라의 원한을 풀어줄 거라 '착각'했기 때문이다. 초나라 사람들은 진승이 회왕의 후손을 왕으로 세워 그 한을 풀어주리라 여겼다. 그런데 진승은 스스로 왕이 되었으니, 민심이 그에게 실망하는 건 당연하지 않겠는가? >---- >[[범증]] 거의 성공 직전으로 보였던 진승의 난은, 장한의 대반격이 시작되면서 물거품으로 끝났다. 장초는 건국을 알린 지 1년도 되지 않아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졌다. 이렇게 된 이유로는 애당초 [[진승]]에게 자체적인 역량이 없었던 점이 크다. 진승은 가난한 평민 출신으로 본인도 기반이 없었고, 처음 반란을 일으킨 당시의 상황도 상당히 즉흥적이었으며,[* 애초에 진승의 행보는 오락가락하는데 처음에는 대흥초 진승왕이라는 구호로 자신이 왕이 될 것으로 프로파간다를 퍼뜨리고 봉기를 일으키면서는 왕후장상 영유종호라 하더니 나중에는 자신이 부소라고 사칭하였으며 그 다음에는 다시 자신이 왕이 된다. 그나마 초나라 복국과 자신이 왕이 되려는 마음만은 진짜였던 것 같긴 하지만 그럼 부소 사칭은 왜 했는가 의문이다.][* 사실 의문이고 자시고 할 것 없이 그냥 프로파간다라고 보면 된다. 어차피 무지렁이인 진승이 왕이 되려면 당시 유명한 이름을 갖다붙일 수밖에 없었던 것. 부소를 사칭한 것도 사람을 모으는데 쓸모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게 뻔하다. 초나라 복국도 마찬가지로 진승 본인이 초나라 출신이라 그런 것도 있겠지만 당시 가장 마지막까지 진에 저항한 나라가 초나라인 만큼 그 이름을 쓰는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한마디로 어차피 진승이나 그 휘하 사람들이나 원래는 무지렁이 농민 출신이었으므로 무슨 깊은 사상 정치에 대한 이해같은 건 없었다. 그런 만큼 적당히 진승 자신에게 도움이 되고 유랑민들이 적당히 혹할 만한 소스가 있다면 딱히 가리지 않고 썼다고 봐야 할 듯하다.] 이후 반란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최대 수십만에 달하던 장초의 거대한 병력은 본질적으로는 오갈 데 없는 유랑민들을 긁어모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은 그저 진나라의 폭정 때문에 합류했을 뿐이었고, 진승과 장초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 즉 갑작스럽게 세력을 불린 만큼, 무너지는 순간도 한순간이었다.[* 사실 아무리 가혹한 폭정으로 다스린다고 해도 중앙정부의 행정력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농민반란이 성공한 예는 세계사를 통틀어 거의 없다.] 물론 평민 출신으로 갑작스럽게 일어난 진승에게 자체적인 역량이 없었다는 점은 어쩔 수 없는 핸디캡이긴 하다. 그러나 이후 전개과정을 보면 진승은 좀 더 좋은 방향으로 상황을 이끌 기회가 몇 번 있었는데 이를 놓쳤고, 문제를 간파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상황을 너무 [[과대|과대평가]] 해버렸다. 앞서 말했듯이 평민 출신인 [[진승]]은 어떠한 배경도 없었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도 그저 진승이 가장 먼저 세력을 일으켰기에 진승을 따랐을 뿐이다. 진나라에게 멸망당한 여러 나라의 유신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목적은 진나라에게 멸망한 전국시대 여섯 나라를 부활시키는 데 있었다. 만약 이러한 상황에서 진승이 멸망한 나라들의 후예를 찾아 옹립하고 스스로 보좌하는 위치에 있었다면 여러 사람들을 이끌 수 있는 명분적 기반을 만들 수 있었겠지만, '''진승은 스스로 왕위에 올라 버렸다.''' 이는 장초의 여러 장수들이 줄줄이 서로 독립을 꾀하는 막장스런 사태로 이어졌다. 장한의 군대가 진군할 때, '''독립한 나라들 중 단 한 나라도 진승을 도우려 하지 않았다.''' 결국 진승 본인에게는 아무런 힘도, 권위도 없었다.[* 만약 진승 본인에게 실력이 있었거나 혹은 진나라를 쳐서 무너뜨렸다면 그 권위에 힘입어 제위에 오를 수 있었겠지만 진승은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자 공동의 적인 진나라를 아직 처리하지도 못했으면서 바로 왕위에 오르는 악수를 두었다. 괜히 장이가 진승에게 먼저 진을 쳐 무너뜨리라고 말한 게 아니다.][* 진승이 왕위에 오르면 그를 따르던 무리들에게 보답을 해줘야 하는데 그러면 결국 무리는 나눠지게 되고 땅도 나눠줘야 하므로 힘 자체가 분산된다. 하지만 진승에게 권위는 없으므로 이후 진승이 위험하더라도 떨어져 나간 이들을 부릴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그러니 왕위에 오르기보다는 모처럼 모인 수십만 대군으로 진을 쳐서 멸망시킨다면 반대로 그 실적으로 인해 권위가 생기고 그러면 왕이 아니라 황제 자리에 오를 수도 있는 것이다.] || [[파일:exhZWG5.jpg|width=400]][br]드라마 '''[[초한전기]]의 장한''' || 물론 [[장한]]의 대처도 빼 놓을 순 없다. 장한은 멸망 직전의 상황에서 연거푸 대승을 거두어 장초를 무너뜨리고 진승을 참살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이렇다 할 만한 패전조차 없었다. 과거 전국시대에 육국을 벌벌 떨게 하였던 진나라의 가공할 국력은 이 시점까지 희미하게나마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저소손의 말처럼, 과거 가공할 군세와 엄청난 영화를 자랑하던 전국시대의 육국들조차 여지없이 무너뜨리던 진나라는 그들과 비교도 되지 않을 진승과 당초 수백에 지나지 않던 진승과 오광의 무리에게 뒤흔들렸다. 이는 당시 진나라의 상황이 그만큼 막장이라는 점을 여지없이 보여주는 이야기. 별다른 힘도 없었던 진승과 오광이 거병하자 천하가 호응하여 들고 일어났다는 점은, 진나라를 파국으로 이끌고 간 것은 결국 진승과 오광이 아니라 진나라 체제 자체의 모순이었다는 점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진승의 반란 자체는 허무하게 진압되었으나 그가 반란을 일으키고 스스로 왕이 된 것은 [[나비효과|당대뿐 아니라 후대에도 크나큰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이후로도 왕조의 혼란과 교체기 때 다른 문화권들이 [[작위 요구자|귀족 혈통의 후예 등을 내세우며 상속권을 주장하면서]] 들고 일어선 것과 달리, 중국 문명권은 그런 거 없이 신분이 어떻건 무리를 지을 힘이 있는 자들은 누구나 황제를 자처해서 들고 일어났으며, 진승보단 조금 나았지만 마찬가지로 [[개천에서 용 난다|평민 출신이면서 황제에 오른]] [[고제(전한)|한고조]], 훗날의 [[홍무제|명태조]], 분열왕조까지 합치면 [[석륵|노예 출신 황제]]까지 등장하는 등 혼란기에는 힘을 가지고 있다면 누구나 제위를 주장할 수 있는 풍토가 만들어지게 된다.[* 전근대 이전까지 평민이 바로 제국의 황제가 될 수 있던 지역은 중원왕조 국가들과 군인 황제 시대 이후의 로마 정도로 매우 희소한 편이다.] '''[[초한전쟁|그리고, 진승, 오광이 뿌린 불씨는 거대한 태풍의 도래를 알리는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youtube(SZBaX4bI6Sk)] 이 사건을 바탕으로 [[인터내셔널가]] [[상고한어]] 버전이 나왔다. 중국의 사이트인 [[비리비리]]에 처음 업로드되었다. 스토리는 [[진나라]]의 폭정에 지친 백성들이 [[진승·오광의 난|진승·오광의 봉기]]로 탄생한 장초(張楚)를 환영하는 모습이 담겨져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